다음글은 전지적 경찰관 시점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1. 현장에서 시작된 이야기
몇 해 전, 평일 오후 3시.
한 어린이집에서 “아동이 밀쳤다”, “소리 질렀다”는 학부모의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신고 내용은 비교적 단순했지만, 어린이집 CCTV 영상이 확보되었다는 말에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부모 측은 영상에서 교사가 아이를 거칠게 다루는 장면이 있다며 강력한 조치를 요구했고,
어린이집은 “오히려 아이가 먼저 위험한 행동을 해 제지했을 뿐”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현장에 도착한 저는 CCTV 영상을 반복해서 확인했습니다.
아이의 손을 붙잡는 교사의 모습이 두세 차례 반복됐고, 부모는 “보세요, 이게 학대 아닙니까”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영상은 어딘가 맥이 끊긴 듯 보였고, 사운드도 없어 상황의 분위기나 대화 내용은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영상은 있었지만, 진실은 없었습니다.
2. 영상은 진실을 담지만, 전부는 아니다
많은 분들이 CCTV 영상만 보면 사건의 실체가 분명히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 수사 현장에서는 정반대입니다.
영상은 단서일 뿐, 그 자체로 결론이 되지 않습니다.
아이의 울음, 교사의 말투, 상황 이전의 맥락, 주변 교사의 반응 등은
영상이 담지 못하는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특히 보육 현장에서는 아이들이 갑작스럽게 돌발행동을 하거나,
다른 교사나 아이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자연스러운 접촉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CCTV는 그 순간만 보여줄 뿐,
왜 그런 행동이 나왔는지에 대한 ‘이유’는 말해주지 않습니다.
3. 경찰의 시선: 판단보다 확인이 먼저다
신고가 들어오면 경찰은 중립적인 입장에서 객관적인 증거 확보와 진술 분석에 집중합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보호자들이 영상만으로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영상 하나를 들고 와 “봐주세요, 여기에 다 나와 있어요”라고 말하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봐주는’ 것이 아니라 ‘확인하는’ 사람입니다.
영상의 시각, 해상도, 편집 여부, 맥락, 앞뒤 장면이 모두 균형 있게 확인되어야
수사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경찰은 교사의 말을 듣고, 보호자의 입장을 듣고, 주변인의 진술을 모읍니다.
모두에게 불편한 역할이지만, 우리는 오직 하나의 진실을 위해 이 과정을 반복합니다.
4. 억울함 앞에서의 중재 – 경찰의 딜레마
위 사건의 교사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그날은 아이가 손에 들고 있던 블록을 친구에게 던지려고 해서, 너무 놀라서 손을 잡은 거예요.
그것뿐인데, 그게 학대로 보인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장면은 영상에도 있었지만, 그 맥락은 없었습니다.
교사의 대응은 과하지 않았고, 아이도 별다른 정서적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경찰은 ‘혐의 없음’ 결정을 내렸지만, 그 이후에도 어린이집은 폐원 위기에 몰렸고,
교사는 지역 커뮤니티에서 이름이 오르내렸습니다.
우리는 중립적으로 판단했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경찰로서 때때로 고민에 빠집니다.
“영상이 있었는데, 진심은 왜 가려졌을까”
“절차는 지켰지만, 그 사람은 왜 상처받았을까”
5. 결론 – 영상보다 중요한 건 ‘이해’입니다
CCTV는 소중한 증거입니다.
하지만 증거라는 건 절차와 맥락, 사람 사이의 정황과 함께 해석될 때 진실이 됩니다.
영상을 보며 분노하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경찰은 감정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법을 따르고, 진술을 듣고, 흐름을 분석합니다.
아이를 위한 마음, 교사의 억울함, 부모의 두려움.
그 모든 것을 조율하고 균형 있게 바라보는 것이
경찰이라는 이름 아래 저희가 맡은 역할입니다.
혹시 앞으로 비슷한 상황이 생긴다면,
영상만 보지 마시고 그 장면에 담기지 않은 이야기에도 귀 기울여 주세요.
영상이 보여주지 못한 진실까지 살펴보는 것, 그게 바로 경찰이 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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